1,500여 년 전, 배봉산 정상에서는 군사들이 사방을 살피며 한강과 중랑천 일대를 지켰다.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배봉산 정상부에 자리한 ‘배봉산 보루’는 삼국시대 군사 방어시설인 관방유적이다. 주변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됐던 곳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18일 저녁, 그 옛날 군사들이 긴장 속에 주변을 살피던 자리에는 대금과 해금, 기타와 아코디언 선율이 흘렀다.
그리고 붉게 물드는 하늘 아래 저마다 다른 세월을 살아온 주민들이 ‘10년 전의 나’를 돌아보고 ‘10년 후의 나’를 그렸다.
동대문구(구청장 최동민)는 이날 오후 5시30분부터 배봉산 정상부에서 주민 500여 명이 함께한 가운데 ‘2026 배봉산 노을음악회’를 열었다.
올해 음악회는 배봉산 보루 발견 10주년을 맞아 ‘나의 10년 전, 우리의 10년 후’를 주제로 마련됐다.
과거 군사들이 소통과 신호를 주고받던 보루의 의미를 오늘날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는 ‘라디오’ 형식으로 풀어냈다. 주민들이 미리 보내온 삶의 사연과 신청곡을 공연 사이사이에 소개하며 음악과 이야기가 함께 흐르는 무대를 만들었다.
“10년 전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리고 10년 후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게 될까요?”
사회를 맡은 경인방송 DJ 문현아의 질문과 함께 음악회가 시작됐다.
그는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훗날 내가 그리워할 한 장면을 이미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며 주민들을 10년 전과 10년 후의 시간으로 안내했다.
첫 무대는 동대문구 지역예술인 퓨전국악팀 ‘휘황찬락’이 열었다.
대금과 해금, 가야금, 판소리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나라’를 시작으로 ‘인연’, ‘난감하네’, 아리랑 연곡이 이어졌다. “얼씨구”에 “좋다”로 화답하는 주민들의 추임새가 더해지면서 배봉산 정상은 금세 흥겨운 우리 가락으로 채워졌다.
이날 음악회의 또 다른 주인공은 주민들이 보내온 평범하지만 특별한 삶의 이야기였다.
청량리동의 한 주민은 10년 전 갑작스러운 오십견으로 직장을 그만둔 뒤 가슴에 품었던 꿈을 찾아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사연을 전했다.
어느덧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 된 그는 내년이면 일흔. 방송통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해 배움을 이어가고, 10년 뒤 여든 살에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회복지사로 살아가고 싶다는 꿈을 꺼내놓았다.
그가 신청한 노래는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였다.
인생의 황혼이 그저 쓸쓸하기만 한 시간이 아니라 낭만으로 가득 찰 수 있기를 바란다는 그의 사연은 이날 음악회의 주제와도 꼭 닮아 있었다.
이어 동대문구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기타리스트 ‘LATENCY 희연’이 무대에 올라 노을에 어울리는 기타 선율을 들려줬다.
그리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주민들이 기다리던 가수 최백호가 무대에 올랐다.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은 최백호는 노래 사이사이 자신의 지난 세월을 담담하고 유쾌하게 풀어냈다.
“76살까지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합니다.”
젊었을 때는 노래가 일이었지만 이제는 노래하는 순간 자체가 행복하다는 그의 말에 객석에서는 박수가 이어졌다.
그러더니 주민들에게 또 하나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아흔 살에 콘서트를 꼭 할 겁니다.”
사람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90살에도 무대에 서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는 말이었다.
누군가는 여든 살의 사회복지사를 꿈꾸고, 누군가는 10년 뒤에도 지금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다정한 하루를 보내기를 바랐다. 그리고 일흔여섯의 노가수는 아흔 살에도 노래하겠다는 꿈을 이야기했다.
나이는 달라도 ‘10년 후’를 기다리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다.
최백호는 이날 배봉산을 처음 찾았다며 가을바람과 노을이 어우러진 풍경에도 감탄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은인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 ‘낭만에 대하여’를 부르자 산 정상에 모인 주민들은 저마다 지나온 어느 날을 떠올리듯 무대를 바라봤다.
최동민 동대문구청장도 이날 무대에 올라 자신의 ‘10년 후’를 꺼내놓았다.
최 구청장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고 골목마다 따뜻한 정이 넘치는 동네를 떠올리며, 앞으로는 사계절 푸른 나무와 꽃이 반겨주고 청년들은 꿈을 펼치며 어르신들은 편안하고 아이들이 “우리 동네에서 살아서 참 행복해요”라고 웃을 수 있는 동대문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삶이 곧 우리 구의 역사가 되어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다 같이 행복을 노래하는 동대문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고 했다.
해가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춘 뒤에도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무대에 오른 ‘아코디언 아트’는 러시아 민요와 프랑스 샹송, 아르헨티나 탱고 등 아코디언 선율로 ‘여권 없는 세계여행’을 펼쳤다. 주민들은 어둠이 내려앉은 배봉산 정상에서 음악을 따라 잠시 또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공연이 끝날 무렵 산 아래 동대문구에는 하나둘 저녁 불빛이 켜졌다.
1,500년 전 이곳에 서 있던 군사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도 어쩌면 저 산 아래 펼쳐진 사람들의 평범한 삶과 저녁 불빛이었을지 모른다.
군사적 요충지였던 보루는 긴 세월을 건너 이제 주민들이 노을을 바라보고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지난날과 다가올 시간을 이야기하는 곳이 됐다.
해는 졌지만 이야기는 남았다.
누군가에게 지난 10년은 견뎌온 시간이었고, 누군가에게 앞으로의 10년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그리고 이날 배봉산 정상에서 그 시간들은 하나의 노래가 됐다.
“아흔 살에도 콘서트를 하겠다”는 노가수의 약속처럼, 이날의 노을도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내일을 기다리는 한 장면인지 모른다.
이날 배봉산 노을음악회에는 최동민 동대문구청장과 부인 이승아 작가를 비롯해 이의안·박규남·이영남 서울시의원, 이재선 동대문구의회 부의장, 장성운 운영위원장, 이주환 행정기획위원장, 서정인 복지건설위원장, 노연우·이도연·안외돈·김태환·박영화·윤순옥 구의원 등이 참석해 주민들과 가을 노을과 음악을 함께했다.
[동대문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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