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올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세상에 펴낸 지 580돌이 되는 해이자, 한글날의 출발점이 된 ‘가갸날’이 제정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훈민정음은 1446년 세상에 반포됐다. 그리고 480년이 흐른 1926년,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지키려 했던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 사람들이 음력 9월 29일을 정해 처음으로 ‘가갸날’ 기념식을 열었다. ‘가갸날’은 이후 ‘한글날’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니 올해 한글날은 조금 더 특별하다. 훈민정음 반포 580돌, 가갸날 100주년.
세종은 제 뜻을 글로 나타내기 어려웠던 백성들을 위해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580년. 한글은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학문을 전하는 글자가 되었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따뜻한 일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을 남기는 일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한글을 손에 쥔 우리 조상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썼을까.
그들도 우리처럼 부모를 걱정하고 자식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멀리 떠난 남편과 아내를 기다렸고, 사랑하는 사람의 소식이 없으면 애가 탔을 것이다. 보고 싶었고, 기다렸고, 헤어지면 울었을 것이다.
왕조의 역사는 임금과 전쟁과 정치의 기록을 남겼지만, 오래된 한글편지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속마음을 남겼다. 그래서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자 가갸날 100주년을 맞아 한글의 우수성을 다시 이야기하기보다, 그 글자로 남겨진 우리 조상들의 사랑과 그리움, 가족과 부부, 이별과 기다림의 이야기를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500여 년 전 남편이 아내에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개인 한글편지로 알려진 것은 1490년대 나신걸이 아내 신창 맹씨에게 보낸 편지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불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다.
함경도에서 군관으로 근무하던 남편은 집에 있는 아내에게 필요한 물건과 집안일을 부탁했다. 아내를 위해 분과 바늘도 마련해 보냈다.
거창한 사랑의 고백은 없다. 그런데 편지 사이에서 남편의 마음이 보인다. 집에 들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안타까움에 울며 간다는 심정을 적었다.
500여 년 전의 사랑도 별것 아니었던 모양이다. 멀리 떠나며 아내에게 필요한 물건 하나 챙겨주고, 잘 있으라고 당부하고, 돌아서서는 눈물을 훔치는 것.
사랑한다는 말보다 어쩌면 그것이 더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부부의 하루까지 한글에 담겼다
17세기 전반 진주 하씨 무덤에서 나온 한글편지는 150여 건에 이른다. 남편 곽주가 아내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질병과 치료, 아이들의 교육, 음식과 살림살이까지 가족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읽다 보면 사랑이 꼭 뜨거운 말이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밥은 먹었는지, 몸은 괜찮은지, 아이는 잘 있는지, 집안에 필요한 것은 없는지. 부부가 오래 함께 살면서 주고받는 사랑은 그렇게 생활이 된다.
젊은 날의 ‘보고 싶다’는 말이 세월이 흐르면 ‘몸은 괜찮으냐’는 말로 바뀌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 희도록 함께 살자 하시더니”
그리고 1586년,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의 가슴을 치는 한 장의 편지가 있다.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난 이응태의 무덤에서 발견된 아내의 편지다.
아내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편지에 아들 ‘원이’가 등장해 오늘날 우리는 그를 ‘원이 엄마’라고 부른다.
아내는 죽은 남편에게 묻는다.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함께 살다가 같이 죽자고 하지 않았느냐고. 살아 있을 때 둘이 누워서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사랑할까' 하는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한다.
그런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어린 자식을 데리고 세상에 남았다.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나 죽은 사람에게 편지를 보낸들 답장이 올 리 없다.
그래서 마지막 소원은 더욱 애절하다.
꿈에서라도 와 달라는 것이었다.
5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이라면 시대가 달라도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한 번만 더 보고 싶고, 한 번만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
꿈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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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6년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이응태에게 아내가 남긴 한글편지. 머리가 희도록 함께 살자던 약속을 떠올리며 남편을 그리워하고, 꿈에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을 적었다. 아들 ‘원이’가 등장해 ‘원이 엄마의 편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추사도 아내 앞에서는 한 사람의 남편이었다
세월을 건너 19세기로 오면 추사 김정희가 있다. 우리는 그를 『세한도』와 추사체를 남긴 대학자이자 예술가로 기억한다.
그러나 아내에게 보낸 한글편지를 읽으면 그 거대한 이름 뒤에서 평범한 한 남편을 만나게 된다. 멀리 떨어져 지내며 아내의 건강을 걱정하고 집안일을 의논했다.
제주 유배 중이던 1842년 아내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더욱 그랬다. 학문도 명예도 사람의 가장 깊은 슬픔까지 대신 견뎌주지는 못한다.
세상에서 아무리 큰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저 한 사람이다.
보고 싶고, 걱정되고, 떠나면 그리운 사람.
그리고 마침내 ‘연애편지’의 시대가 왔다
시간은 흘러 1920년대가 됐다. 이 무렵 ‘연애’라는 말이 젊은이들의 가슴을 흔들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노자영이 엮은 『사랑의 불꽃』이라는 연애서간집까지 등장했다. 첫사랑의 설렘에서 그리움과 이별까지 남녀의 사랑을 소재로 한 19편의 편지가 실렸다.
실제 연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그대로 모은 책이라기보다 문인들이 쓴 연애서간집에 가깝지만,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일종의 ‘연애편지 교본’처럼 읽혔다.
그 속의 사랑은 뜨겁다 못해 처절하다. 한 편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이렇게 쏟아낸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살았어요! 그리고 당신을 위하여 죽어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살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지금 읽으면 조금은 낯간지럽고 지나치다 싶을 만큼 격정적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청춘의 마음이 어디 시대를 가렸을까.
조선의 한글편지가 살림을 걱정하고 가족의 안부를 물으며 사랑을 담았다면, 근대의 젊은이들은 이제 그 마음을 감추지 않고 ‘연애’라는 이름으로 한글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표현은 달라졌지만 마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보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으며, 떠나면 그리웠다.
글자는 말을 적고, 편지는 마음을 남겼다
세종은 580년 뒤 사람들이 이 글자로 연애편지를 쓸 것까지 생각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쉽게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던 글자는 세월이 흐르며 사람의 가장 사적인 마음까지 품게 됐다.
어머니에게는 안부를 물었고 자식에게는 걱정을 적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필요한 물건을 챙겼고, 아내는 먼저 떠난 남편을 한글로 불렀다. 그리고 연인은 사랑을 고백했다.
그 편지를 썼던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세상에 없다. 그들이 살던 집도 사라지고, 그들이 걷던 길도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몇 줄의 글은 남았다. 그리고 500년 뒤 우리가 그것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람은 떠났는데 마음은 남았다.
어쩌면 그것이 글자가 가진 가장 따뜻한 힘인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순간을 사라지지 않게 하고, 보고 싶었던 마음을 세월 너머의 누군가에게까지 전해주는 것.
훈민정음 반포 580돌, 가갸날 100주년.
한글날을 맞아 오래된 편지를 들여다보다가 새삼 알게 된다. 우리 조상들도 우리처럼 사랑했고, 기다렸고, 걱정했고, 헤어지면 아파했다.
사랑의 방법은 달라졌어도 사람의 마음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 한가운데에 한글이 있었다.
글자는 말을 적었지만,
세월은 그 글자를 사랑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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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6년 간행된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의 창제 취지와 글자의 원리·용례 등을 담고 있다. 올해는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자 가갸날 제정 100주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