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에 걸쳐 십수 년의 노력 끝에 내 집을 마련한 사람이 있다. 집을 사고 가장 가슴 벅찼던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물었더니, 의외로 ‘문패를 달았을 때’였다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아 자다가도 몇 번씩 밖으로 나가 자기 이름이 적힌 문패를 만져보고 들어왔다고 한다.
요즘은 아파트가 일반화되면서 문패를 다는 집도 드물다. 대신 어렵게 내 집을 마련한 뒤 등기부등본을 여러 차례 확인하며 정말 내 이름으로 소유권이 이전됐는지 확인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 감동이 오죽했을까.
과거에는 월세방 하나를 얻어 살면서도 집주인 눈치를 봐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이 뛰기라도 하면 혹여 “방 빼라”는 말을 들을까 발뒤꿈치를 들고 다니라고 타이르며 숨죽여 살았다는 이야기도 낯설지 않다.
그런 세월 끝에 마련한 내 집이다. 비록 작은 집이라도 대문 앞에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문패를 다는 순간, 비로소 ‘이곳이 내 집이구나’ 하는 깊은 감격이 밀려왔을 것이다.
도시에도 이런 문패가 있다.
바로 BI(Brand Identity), 도시의 얼굴이다.
동대문구의 ‘서울의 문 동대문’이라는 상징도 만들어진 지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다. 당시에는 동대문이라는 역사적 이미지와 지역명을 연결한 나름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오래됐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좋은 상징이라면 50년, 100년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문패가 지금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주민들과 앞으로 살아갈 미래세대의 꿈까지 충분히 담아내고 있느냐는 점이다.
20여 년 동안 동대문구는 크게 변했다.
재개발·재건축과 도시정비를 통해 주거환경이 달라졌고, 교통·교육·복지·문화 등 생활 인프라도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발전했다. 구 재정 규모 역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청량리는 수도권 광역교통의 중심으로 변하고 있고, 홍릉 일대에는 바이오·의료·연구개발이라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자리 잡고 있다. 경희대·한국외대·서울시립대를 비롯한 대학과 청년의 자산이 있고, 약령시장과 경동시장 등 전통의 자산도 여전히 살아 있다.
세계는 더 빠르게 변했다.
20여 년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세상을 이제 우리는 스마트폰 하나로 경험한다. AI에게 질문하고, 지구 반대편 도시를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며, 국경을 넘어 사람과 기업, 도시가 경쟁하는 시대다.
그런데 현재의 동대문구 BI를 바라보며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이 문패가 지금의 동대문구를 제대로 대표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동대문구라는 이름에 ‘동대문’이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정작 행정구역상 존재하지 않는 동대문의 형상을 지역 대표 이미지로 지속 사용하는 것이 오늘날에도 가장 적절한 선택인지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동대문은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서울의 역사다. 그것을 지우거나 부정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동대문은 현재 동대문구에 위치해 있지 않으며, 현실적으로 다시 동대문구의 행정구역 안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높지 않다. 그렇다면 이름의 역사성은 존중하되, 도시의 얼굴까지 반드시 ‘없는 동대문’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집은 몰라보게 달라졌는데 문패에는 여전히 옛집 그림이 남아 있는 셈이다.
이제는 BI 하나만 볼 일도 아니다.
BI뿐 아니라 캐릭터, 슬로건, 각종 도시 상징물까지 지금의 동대문구와 미래세대를 제대로 담고 있는지 함께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각각 따로 만들어 사용하다 보면 도시가 주민과 외부에 전달하는 이미지 역시 흩어질 수 있다. 역사·현재·미래를 하나의 방향으로 묶는 동대문구만의 상징체계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AI 시대, 혁신도시, 미래 경쟁력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제 말뿐 아니라 도시의 얼굴에서도 미래가 보여야 하지 않을까.
청량리의 역동성, 홍릉의 바이오·연구개발, 대학과 청년의 활력, 전통시장의 역사성, 중랑천과 배봉산의 자연환경, 재개발·재건축으로 변화하는 주거환경까지.
오늘의 동대문구와 내일의 동대문구를 하나의 상징 안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고민해볼 시점이다.
물론 당장 BI와 상징물을 모두 갈아치우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몇몇 전문가에게 맡겨 새 그림 하나를 만든 뒤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멀쩡한 간판과 시설물을 한꺼번에 교체해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는 방식이라면 오히려 신중해야 한다.
먼저 주민에게 물어야 한다.
“현재의 BI와 도시 상징물이 오늘의 동대문구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그다음은 청년과 학생, 어르신과 상인, 전문가와 지역 대학·기업 등 다양한 주체가 함께 앞으로 20년, 30년 뒤 동대문구가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할지를 그려보는 것이다.
공모도 하고 전문가의 도움도 받되, 여러 시안을 주민에게 공개하고 충분한 의견수렴과 선택의 과정을 거치면 된다.
새로운 BI와 상징물은 단순히 보기 좋은 디자인이어서는 안 된다. ‘서울의 한 부도심’이라는 오래된 이미지를 넘어 서울 동북권의 중심도시, 나아가 세계와 연결되는 미래도시라는 동대문구의 비전을 담아야 한다.
과거 동대문구가 ‘서울의 문’을 이야기했다면 이제 질문을 한 단계 더 넓혀볼 수도 있다.
앞으로 동대문구는 무엇을 향한 문이 될 것인가.
미래로 향하는 문인가, 세계로 향하는 문인가, 사람과 기술을 연결하는 문인가, 아니면 역사와 첨단산업이 공존하는 새로운 서울의 중심인가.
그 답을 행정이 먼저 정할 필요는 없다.
주민에게 물으면 된다.
내 집을 마련한 사람이 문패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던 이유는 그 나무판이 비싸서가 아니었다. 그 안에 살아온 세월과 노력,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희망이 함께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문패도 그래야 한다.
21년이 지났기 때문에 바꾸자는 것이 아니다.
21년 동안 도시가 이만큼 달라졌기 때문에, 현재의 BI와 상징물들이 오늘의 동대문구와 앞으로 살아갈 미래세대의 꿈까지 제대로 담아내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보자는 것이다.
새로운 집을 지었는데도 언제까지 옛집 문패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
지난해 우리는 광복 80주년을 지나 올해 81주년을 맞았다. 광복 직후 원조를 받아야 했던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정보통신 강국으로 성장했고, 세계시장을 이끄는 기업과 첨단기술을 가진 나라가 됐다. 불과 몇 세대 만에 상상하기 어려웠던 변화를 이뤄냈다.
그렇다면 동대문구도 이제 과거의 ‘서울의 문 동대문’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AI 시대와 미래세대를 향한 새로운 문을 고민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역사는 간직하되 미래를 가두지는 말아야 한다.
새로운 BI와 도시 상징체계가 단순히 로고와 그림 몇 개를 바꾸는 작업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이 함께 동대문구의 미래를 고민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세대와 지역을 잇고 주민화합을 이끌며, 서울 속의 동대문구를 넘어 세계 속의 동대문구로 나아가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새로운 문을 열었듯, 이제 동대문구도 AI 시대를 향한 새로운 문패를 주민과 함께 만들어볼 때다.
‘서울의 문’을 넘어 ‘미래의 문’, ‘세계의 문’으로.
새로운 동대문구 BI와 상징물이 그 첫 문을 여는 작은 열쇠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동대문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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