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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불인생(假拂人生) — 월급날 빈 봉투를 받아들던 사람들」

2026-09-04 15:56 | 입력 : 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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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급날 빈 봉투를 받아들고도 가족 앞에서는 웃었던 사람들…그렇게 청춘을 내어주며 한 세대가 늙어갔다
- 가불은 사라졌어도 삶의 무게는 남았다…빚과 생활비에 쫓기면서도 내일을 향해 달리는 청춘들이여, 힘내시라

‘가불(假拂)’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월급날이 오기 전에 봉급의 일부를 미리 당겨 받는 것. 요즘 세대에게는 조금 낯선 말이 되었지만, 한때 우리네 삶에는 참 흔한 말이었습니다.

쌀이 떨어지고 연탄도 떨어졌습니다. 아이들은 먹여야 하고 겨울방은 덥혀야 하는데 월급날은 아직 멀었습니다. 쌀집에서 되박쌀을 외상으로 들이고 연탄도 외상으로 들였습니다. 그래도 모자라면 회사에 다음 월급을 미리 가불해달라고 손을 벌렸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넘기고 또 하루를 넘겼습니다.

"월급날 받아든 빈 봉투"

한 달 동안 죽어라 일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잔업을 했습니다. 졸음을 참아가며 기계를 돌리고, 때로는 코피까지 쏟아가며 버텼습니다. 집에는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급날. 한 달을 꼬박 일한 월급봉투를 받아들었지만 이미 가불한 돈을 제하고 외상값을 갚고 나면 손에 남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빈 봉투’였습니다.

그러나 삶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다시 쌀이 필요했고 다시 연탄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면 또 다음 월급을 당겨 썼습니다.

가불하고, 일하고, 빈 봉투를 받고…. 그렇게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고, 청춘이 갔습니다.

‘가불인생’이었습니다.

"어쩌면 청춘까지 가불했는지도"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고단한 세월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도 자식 입에 밥 한 숟갈 더 들어가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고, 내 옷 한 벌보다 아이들 학비와 책가방을 먼저 챙겼습니다.

어쩌면 그분들이 가불한 것은 월급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청춘을 가불했고, 건강을 가불했고, 때로는 자신의 인생까지 미리 당겨 가족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월급봉투가 사라진 세상"

세월이 흘러 이제 월급봉투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월급날이면 봉투 하나를 손에 쥐고 몇 번이고 액수를 세어보던 풍경 대신, 이제는 통장에 숫자로 월급이 들어옵니다. 요즘 세대는 월급봉투를 받아들던 그 묘한 설렘을 아마 잘 모를 겁니다.

그렇다고 지금 세대의 삶이 마냥 편해진 것만은 아닙니다. 월급은 통장으로 들어오지만 월세와 대출금, 카드값, 보험료, 통신비 등이 기다렸다는 듯 자동으로 빠져나갑니다. 손에 한번 쥐어보지도 못한 월급이 통장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셈입니다.

어떤 집에서는 아내가 통장과 카드를 도맡아 관리해 정작 월급을 벌어온 남편은 자기 월급이 얼마 들어왔다가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일조차 없는 재미있는 풍경도 봅니다.

예전 가장이 빈 월급봉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면, 요즘은 월급봉투 자체를 구경하지 못한 채 휴대전화 속 통장 잔액을 들여다보는 시대가 됐습니다.

"가불은 사라졌지만"

생각해보면 신용카드도 오늘날의 또 다른 ‘가불’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장 현금이 없어도 먼저 쓰고 다음 달 월급으로 갚습니다. 형편보다 조금 더 쓰다 보면 다음 월급은 지난달 카드값을 갚기 위해 기다리는 돈이 되고, 부족하면 다시 카드를 사용합니다.

예전에는 쌀이 떨어져 되박쌀을 외상으로 들이고 연탄이 떨어져 다음 월급을 가불했다면, 오늘은 카드와 대출이라는 이름으로 아직 벌지 않은 돈을 미리 당겨 쓰기도 합니다.

취업하고, 월세 내고, 대출 갚고, 카드값 막고…. 결혼과 육아, 내 집 마련까지 생각하다 보면 젊은 날이 참 바쁩니다. 때로는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어디론가 쫓기듯, 그렇게 생활비와 빚 사이에서 젊은 날을 허겁지겁 건너가는 애환도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가불인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이 달라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의 가불은 월급봉투를 비웠고, 오늘의 빚은 아직 오지 않은 월급날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대는 달라도 삶의 무게는 남는다"

어느 세대의 고생이 더 컸는지를 굳이 저울에 올려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세대에게는 쌀과 연탄이 절박했고,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는 일자리와 주거비, 대출과 카드값, 결혼과 육아라는 또 다른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을 힘겹게 건너가는 젊은이들에게도 말해주고 싶습니다. 빚과 생활비에 쫓겨 앞만 보고 달려가더라도 가끔은 숨을 한번 고르고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도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선배들이 그 힘든 세월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듯, 여러분이 힘겹게 건너고 있는 오늘도 언젠가는 지나온 한 시절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청춘들이여, 힘내시라. 아직 여러분 앞에는 가불하지 않은 수많은 내일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분들이 이제 여든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쌀독 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걱정하고, 겨울밤 연탄 몇 장을 걱정하며 다음 월급을 미리 당겨 써야 했던 사람들. 한 달 내내 잔업까지 해가며 일하고도 월급날 빈 봉투를 받아들었던 사람들. 자신에게 돌아올 몫은 뒤로 미룬 채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식들을 공부시키며 그렇게 한 시대를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이 바로 제 앞을 걸어가신 선배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선배님들이 여든을 넘어선 세대가 되셨습니다.

선배님들, 참 많이 배고프셨지요. 참 많이 힘드셨지요. 그래도 자식들 앞에서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다음 날이면 일터로 나가셨겠지요.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가불하지 마십시오. 청춘도, 건강도, 남은 시간도…. 평생 가족에게 먼저 내어주셨으니 이제 남은 날들만큼은 온전히 선배님들의 몫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불하고 또 가불하며 한 시대를 건너오신 선배님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존경합니다. 이제는 남은 날들만큼은 무엇도 미리 내어주지 마시고 온전히 당신들의 몫으로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평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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