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9월입니다.
그토록 뜨겁던 여름도 이제 조금씩 물러날 채비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 끝이 달라지고, 나무와 풀잎의 빛깔에도 조금씩 가을이 스며듭니다.
한 해가 시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홉 번째 달입니다. 9월의 문턱에 서면 무엇을 이루었는지보다 무엇을 놓치고 왔는지, 무엇을 얻었는지보다 아직 마음속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한번쯤 헤아려보게 됩니다.
* 여름이 조용히 눈을 감는 시간
헤르만 헤세는 「9월」에서 가을을 요란하게 불러들이지 않습니다. 정원에는 차가운 빗방울이 스며들고, 나뭇잎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하나둘 떨어집니다.
그리고 여름은 자신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아는 듯 장미 곁에 잠시 머물며 위안을 찾다가 지친 눈을 조용히 감습니다.
참 아름답고도 쓸쓸한 장면입니다.
한 계절이 떠나는데도 붙잡지 않습니다. 여름이 가야 가을이 오고, 꽃이 져야 열매가 익는다는 것을 자연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의 삶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요. 끝까지 붙잡고 싶은 것이 있고, 조금만 더 머물렀으면 하는 사람과 시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떠나야 할 것이 떠나지 않으면 새로운 계절도 들어올 자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9월은 새로운 계절의 시작이면서, 한편으로는 잘 떠나보내는 법을 배우는 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기다리는 동안 낡아가는 것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계절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나룻배와 행인」에서 자신을 나룻배에, ‘당신’을 행인에 빗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행인은 흙발로 나룻배를 밟고 강을 건넙니다. 나룻배는 깊은 물도, 얕은 물도, 급한 여울도 마다하지 않고 그를 안아 건너게 합니다.
그러나 물을 건넌 행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떠납니다. 나룻배만 강가에 남아 바람을 맞고 눈비를 맞으면서도 언젠가 다시 올 행인을 기다립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낡어갑니다.”
그 짧은 한마디에는 참 많은 세월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나룻배가 되어보았을까요. 자식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때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마음 한구석에 남겨둔 채 오랜 세월을 건너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낡았다는 것이 꼭 헛되었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누군가를 건너게 해준 나룻배에는 그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남듯, 기다린 세월에도 우리가 사랑했던 흔적은 남아 있을 테니까요.
* 이제는 열매를 기다릴 시간
가을을 흔히 결실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열매는 어느 날 갑자기 맺히지 않습니다.
봄날 땅속에서 싹을 틔우고, 여름의 뜨거운 햇볕과 장맛비를 견딘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가을의 열매가 됩니다.
우리네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올해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해서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닐 것이고, 아직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늦은 것도 아닐 겁니다.
지금까지 흘린 땀과 눈물, 기다림과 아픔까지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마다의 열매로 조용히 익어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9월에는 무엇인가를 더 움켜쥐기보다 마음의 곳간부터 한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보낼 것은 보내고, 기다릴 것은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것. 그리고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는 것에는 감사하는 것.
그런 마음으로 9월의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여름보다 한결 서늘해진 바람이 불고, 높아진 하늘에는 달빛도 조금 더 맑아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해인 수녀의 「달빛 기도」가 떠오릅니다.
거창한 소원보다는 지나온 날들에 감사하고, 앞으로 맞이할 날들을 조용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작은 기도 하나 올리고 싶어지는 계절입니다.
* 9월, 달빛 아래 마음 하나 내려놓으며
떠나야 할 것은 잘 떠나보낼 수 있기를, 기다려야 할 것은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어진 열매가 크든 작든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기를, 아직 익지 않은 열매라면 조금 더 햇볕과 바람을 견딜 수 있기를 빌어봅니다.
헤세의 여름은 장미 곁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한용운의 나룻배는 오늘도 강가에서 행인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해인 수녀의 「달빛 기도」를 떠올리며 우리도 저마다 마음속 작은 소망 하나를 달빛에 띄워봅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9월이 우리 앞에 왔습니다.
무엇을 거둘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나온 여름이 헛되지 않았기를, 오래 기다려온 시간들이 언젠가는 작은 열매 하나쯤 맺어주기를….
그리고 혹여 기대했던 만큼 거두지 못하더라도 너무 서러워하지 않기를. 열매를 맺지 못한 가지에도 봄과 여름을 견뎌낸 시간은 남아 있을 테니까요.
9월의 첫 달빛 아래 조용히 빌어봅니다.
오는 9월에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도
작지만 따뜻한 결실 하나씩 익어가기를….
어서 오십시오.
9월입니다.
[동대문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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