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졌다.
그렇게 또 가을이다.
며칠 전 선배 한 분께 “가을에 읽을 만한 시나 한시 한 수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몇 편을 보내주셨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왕유의 「산거추명」, 그리고 마치원의 「천정사·추사」였다.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은 가을의 기도를 “겸허한 모국어”라고 부른다. 화려한 말이 아니라, 오래 살아온 사람이 끝내 마음속에서 건져 올리는 가장 낮고 정직한 말일 것이다.
가을이 되면 우리도 그런 말을 찾게 된다.
잘 살고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왔는지, 누구에게 미안했고 누구에게 고마웠는지.
선배가 함께 보내준 왕유의 「산거추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明月松間照
清泉石上流
빈 산에 비가 지나가고
저녁이 되니 가을 기운 깊어라.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로 비치고
맑은 물은 돌 위를 흐른다.
그저 조용한 풍경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사람도 어느 정도 살아오면 이런 고요가 좋아지는 모양이다.
많이 가지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이 편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마음 맞는 사람 몇이 더 귀해진다. 젊은 날에는 앞만 보고 걸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지나온 길을 자꾸 돌아보게 된다.
또 한 편은 마치원의 「천정사·추사」였다.
枯藤老樹昏鴉
小橋流水人家
古道西風瘦馬
夕陽西下
斷腸人在天涯
마른 덩굴과 늙은 나무, 저녁 까마귀.
작은 다리 아래 물은 흐르고 그 곁에는 집이 있다.
서풍 부는 옛길에는 야윈 말 한 필.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나그네는 멀리 길 위에 서 있다.
짧은 몇 줄인데 가을 저녁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해가 짧아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사람 마음도 이상하게 집 쪽으로 향한다.
부모 생각이 나고, 형제 생각이 나고, 한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 생각도 난다.
그리고 가을 한가운데에는 추석이 있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 막혀도 우리는 그 길을 간다.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가고, 이제 계시지 않으면 산소로 간다.
성묘길 풀숲에는 이슬이 맺히고, 벌초가 끝난 봉분 위로 가을볕이 내려앉는다.
말없이 술 한 잔 올리고 절을 한다.
살아계실 때는 하지 못했던 말들이 그제야 마음속에서 나온다.
“잘 계셨습니까.”
“저도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추석이면 누구는 살아 계신 부모를 만나러 고향으로 가고, 누구는 이제 말없는 부모를 만나러 산으로 간다.
한쪽에서는 “왔습니다” 하고 대문을 열고,
다른 한쪽에서는 “왔습니다” 하고 봉분 앞에 선다.
같은 말인데 대답은 다르다.
한곳에서는 “어서 오너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다른 한곳에서는 가을바람만 지나간다.
그래서 성묘길은 조금 쓸쓸하면서도 따뜻하다.
그 앞에 서면 살아가는 동안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쓰고 서운해했는지도 잠시 돌아보게 된다.
성묘란 어쩌면 먼저 간 사람을 찾아가는 일인 동시에, 바쁘다는 핑계로 잠시 잊고 살았던 내 뿌리와 지나온 시간을 다시 찾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산을 내려올 때는 올라갈 때보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가을 산에 누운 사람도,
그 산을 찾아가는 사람도,
결국은 모두 같은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이다.
선배가 보내준 몇 편의 시를 읽다가 결국 사람 생각으로 돌아왔다.
미안했던 사람,
고마웠던 사람,
보고 싶은 사람,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
이번 추석에는 거창한 것을 하지 않아도 좋겠다.
부모님이 계시면 전화 한 통 더 드리고, 만나지 못했던 형제에게 먼저 안부를 묻고, 오래 묵은 서운함 하나쯤 내려놓아도 좋겠다.
가을은 짧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시간도
생각하는 것만큼 길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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